자유게시판 영세 촌눔 김형익에게(2) : 로드 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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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로드 무비
영명(英明)하고도 지혜로우셨던 우리 옛 어른들은 “먼 길 떠날 땐 속눈썹도 떼어놓고 간다”고 하셨는데, 옛 어른들의 그 잘난 후예인 우리 형익 벗님께선 어떤 행색으로 삶의 대륙, 그 무간지옥(無間地獄)의 아틀란티스를 횡단하고 계시온지?
가고 또 가도 제 운명에서 한 발짝도 못 벗어나는 거야 어느 동네나 마찬가지겠지만, 바윗덩이에 매달린 섭조개만한 한반도, 그 귀퉁이에 들러붙은 동해 바닷가나 그 너머 영세(내가 어렸을 적에, 동네 사람들이 ‘쉰 동이 엄마’라고 부르던 할머니가 기억난다. 영세에서 나서 크면서 바다라곤 한번도 볼 기회를 얻지 못한 죄로, 어느날 그만, “다들 바다가 크다, 크다, 하는데, 을매나 크길래... 한 쉰 동이는 되능가?” 하고 말해버린 죄로, 대관령을 넘어와 바다가 가차운 곳에 살게된 이후에도 온동네 사람들로부터 ‘쉰 동이 엄마’로 불렸던 할머니를....) 보다는 어엽게 클 성 싶은 그 동네에선 그 홀림, 그 어지럼증이 훨씬 더 심하구나, 쉽사리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게, 그쪽 동네 코쟁이들이 걸핏하면 만드는 <로드 무비>들이렷다.
그래서, 기성세대의 허위와 위선을 떨치고 새로운 삶을 모델을 찾아헤매던 60-70년대의 이른바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대표적인 영화들---피터 폰다가 오토바이를 타고 내달리는 <이지 라이더>나, 내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인 밥 라펠슨 감독의 같은 것들---이 한결같이 로드 무비들이렷다. 뉴욕에서 클리블랜드로, 다시 콜로라도로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흑백의 세계에서 시작하여 흑백의 세계로 끝나는 짐 자무시의 80년대 영화 <천국보다 낯선>도 마찬가지고.
대학 졸업을 한 달 앞 둔 80년 1월에, 지금은 환경운동 하는 소설쟁이가 된 최성각이와 둘이서, 네 고향마을을 지나갔었다. 젊은 혈기, 그 객기로 강릉 내곡 다리에서 서울 망우리 해태상까지 걸어갔으니까. 어쩐 일인지 영장이 늑장을 부려서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입대해서 화천에서 3년을 군바리답게 F.M.으로 보내고 제대해서 복학하는 바람에, 언감생심 감히 바로 대학원에 진학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잠시 직장생활을 하며 공부를 계속할 준비를 할 요량으로 코리아 헤럴드의 불어시사주간지 신입기자 시험을 치루고 내심 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갑작스런 700리 행군으로 거덜이 나버린 다리를 끌며 서울집에 도착했을 때, 출근하라는 연락이 와있었다. 그렇게, 온통 갈라터진 입술과 새까맣게 탄 숭악한 몰골로, 1년 6개월 동안 계속될 나의 햇병아리 기자생활이 시작되었었다.
‘아메리카’라는 촌스러운 이름의 딴따라를 기억하시는지? 지금도 그 친구들이 부르는 ‘A Horse With No Name’을 듣고앉아있노라면 그 겨울의 바람과 눈이, 그 어둠이, 그 막막함의 살가움이, 그 뼈 시린 온기가 소름이 돋을만치 생생하게 되살아난다(그렇다, 30여년 전에 사모았던 그 지글지글하는 빽판들을 아직도 나는 끌어안고 살아간다. 오오, 딱한 인생이여!). 긴 그림자 끌며 대륙을 가로질러 가고 있는 네게, 비쩍 마른 그림자를 끌며 반도를 가로지르던 그때의 나를, 그 추억을(그 후, 아마도 80년대에, 어딘가에 실었던 글이다.) 첨부파일의 형식으로 건넨다. 자, 간다! 받아라!
영명(英明)하고도 지혜로우셨던 우리 옛 어른들은 “먼 길 떠날 땐 속눈썹도 떼어놓고 간다”고 하셨는데, 옛 어른들의 그 잘난 후예인 우리 형익 벗님께선 어떤 행색으로 삶의 대륙, 그 무간지옥(無間地獄)의 아틀란티스를 횡단하고 계시온지?
가고 또 가도 제 운명에서 한 발짝도 못 벗어나는 거야 어느 동네나 마찬가지겠지만, 바윗덩이에 매달린 섭조개만한 한반도, 그 귀퉁이에 들러붙은 동해 바닷가나 그 너머 영세(내가 어렸을 적에, 동네 사람들이 ‘쉰 동이 엄마’라고 부르던 할머니가 기억난다. 영세에서 나서 크면서 바다라곤 한번도 볼 기회를 얻지 못한 죄로, 어느날 그만, “다들 바다가 크다, 크다, 하는데, 을매나 크길래... 한 쉰 동이는 되능가?” 하고 말해버린 죄로, 대관령을 넘어와 바다가 가차운 곳에 살게된 이후에도 온동네 사람들로부터 ‘쉰 동이 엄마’로 불렸던 할머니를....) 보다는 어엽게 클 성 싶은 그 동네에선 그 홀림, 그 어지럼증이 훨씬 더 심하구나, 쉽사리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게, 그쪽 동네 코쟁이들이 걸핏하면 만드는 <로드 무비>들이렷다.
그래서, 기성세대의 허위와 위선을 떨치고 새로운 삶을 모델을 찾아헤매던 60-70년대의 이른바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대표적인 영화들---피터 폰다가 오토바이를 타고 내달리는 <이지 라이더>나, 내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인 밥 라펠슨 감독의 같은 것들---이 한결같이 로드 무비들이렷다. 뉴욕에서 클리블랜드로, 다시 콜로라도로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흑백의 세계에서 시작하여 흑백의 세계로 끝나는 짐 자무시의 80년대 영화 <천국보다 낯선>도 마찬가지고.
대학 졸업을 한 달 앞 둔 80년 1월에, 지금은 환경운동 하는 소설쟁이가 된 최성각이와 둘이서, 네 고향마을을 지나갔었다. 젊은 혈기, 그 객기로 강릉 내곡 다리에서 서울 망우리 해태상까지 걸어갔으니까. 어쩐 일인지 영장이 늑장을 부려서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입대해서 화천에서 3년을 군바리답게 F.M.으로 보내고 제대해서 복학하는 바람에, 언감생심 감히 바로 대학원에 진학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잠시 직장생활을 하며 공부를 계속할 준비를 할 요량으로 코리아 헤럴드의 불어시사주간지 신입기자 시험을 치루고 내심 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갑작스런 700리 행군으로 거덜이 나버린 다리를 끌며 서울집에 도착했을 때, 출근하라는 연락이 와있었다. 그렇게, 온통 갈라터진 입술과 새까맣게 탄 숭악한 몰골로, 1년 6개월 동안 계속될 나의 햇병아리 기자생활이 시작되었었다.
‘아메리카’라는 촌스러운 이름의 딴따라를 기억하시는지? 지금도 그 친구들이 부르는 ‘A Horse With No Name’을 듣고앉아있노라면 그 겨울의 바람과 눈이, 그 어둠이, 그 막막함의 살가움이, 그 뼈 시린 온기가 소름이 돋을만치 생생하게 되살아난다(그렇다, 30여년 전에 사모았던 그 지글지글하는 빽판들을 아직도 나는 끌어안고 살아간다. 오오, 딱한 인생이여!). 긴 그림자 끌며 대륙을 가로질러 가고 있는 네게, 비쩍 마른 그림자를 끌며 반도를 가로지르던 그때의 나를, 그 추억을(그 후, 아마도 80년대에, 어딘가에 실었던 글이다.) 첨부파일의 형식으로 건넨다. 자, 간다! 받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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