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고한마당

강릉고등학교 총동문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11회 동기회

자료실 친구 희성아 (최선교씀) 2004년7월18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11기 이종관
댓글 0건 조회 276회 작성일 07-08-09 14:25

본문



하늘나라에 있는 내친구 희성이에게, 친구야, 자네가 떠난 지도 벌써 1개월이 되어 가는구나. 속절없는 것이 세월의 흐름이라더니 벌써 그렇게 되었구나. 그래 저 세상에서는 어떻게 지내고 있니. 아마도 고향강릉에서 매일밤 눈물로 지새우며 잠못 이루실 노모와 이곳 서울 염참동에 자네가 수년간 거주하던 집에 사랑하는 처 김미애씨와 아들 현석, 딸 소영이를 그대로 두고 온 너의 마음은 갈갈이 찢겨져 하루도 편할날이 없었겠지. 매일 잠 못 이루며 울고 있을 노모의 쭈글쭈글한 눈가의 눈물을 닦아 주려고 강릉의 삼우가든아파트와 사랑하는 아내, 자식들의 아픈 가슴을 달래주려고 서울 염창동에 있는 너의 삼익아파트로, 강릉과 대관령을 바람같이 휑하니 넘나들 친구의 영혼을 떠올리니 내 마음도 쓰리구나. 지난 추석에는 네가 1대 조상이 되었다고, 너의 아들 현석이가 혼자서 강화 묘소에 다녀 왔다고 하던데 아직 어리디 어린 고 2학년의 현석이의 절을 받는 너의 마음은 다시한번 갈갈이 찢겨졌을 것인데, 그래 부자지간에 만나서 무어라고 말을 나누었니. " 사내로서 집안의 기둥이니 절대 눈물 흘리지 말고 아버지대신에 엄마 잘 도와주고, 동생 소영이를 챙겨주고 공부열심히 하여 집안을 잘 이끌어 가고,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거라. 아빠는 하늘나라에서 엄마와 너희둘을 지켜보고 있을거야"라고 잔소리아닌 잔소리를 하였겠지. 자네가 그립고 자네의 잔영이라도 반추해 보고싶고, 현석이, 소영이에게 한번만이라도 자네가 좋은 아빠였다고 말해 주고 싶어 11기 총무일을 보고있고 경희의료원에서 그 어려운 처지에 있는 자네가 각별히 "신한은행"을 호칭하며 특별히 걱정해 주던 청죽회 멤버 장준혁군과, 강맥회 멤버 최형근군과 같이 10월 셋째주 토요일인 얹그제, 자네가 운명한지 꼭 한달되는 날에 자네의 집을 들렀다네. 집안 구석구석에서 자네의 체취를 느끼며, 자네가 불쑥 어느 방에서 문을 열어 제키면서 자다가 나온 음성과 자세로 거실마루로 나와 " 어, 너희들 왔어"라고 외칠것만 같아 참으로 가슴이 아팠네, 자네가 평소에 사용하던 컴퓨터를 찬찬히 들여다 보며 자네가 그 앞에서 강맥회장부를 작성하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네. 처와 아이들은 외견상으로는 굳굳해 보였고, 현석이와 소영이는 지난주부터이번주까지 시험을 보았다고 하며, 최선을 다했다고 하네만, 아무래도 사랑하는 아빠를 잃은지 불과 1개월도 채안되는 처지에서 치룬 시험이라 많이 흔들렸을 것이네, 차차 마음의 중심을 잡고 지내면 나아지겠지, 우리도 열심히 하라고격려해 주었다네. 이보게나, 먼저 떠나간 자네의 아픔이 워낙 크겠으나, 남은 가족들의 아픔도 떠나간 자네의 아픔보다 크면 컸지 작아 보이지 않았다네. 사람이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자네의 떠난 자리는 너무나 커보였네. 희성아, 자네와 나와의 지난 세월의 소중하고 잊을수 없는 인연과 추억을 조용히 떠올려보니, 내인생의 30대 중반부터 이제 50이 된 현재까지의 10수년간의 중년의 중요한 시기에 한부분 깊숙이 들어와 있는 자네의 무게를 새삼 느끼며, 앞으로도 오랬동안 늘 옆에서 가까이 지낼 친구를 꿈에도 미처 생각하지도 않은 불과 6개월 남짓의 짧은 기간에 영원히 이별할 수 밖에 없는 무력한 현실앞에서 그저 할말도 잃은채 인생의 무상함을 되새길 수 밖에 없구나. 학창시절에는 나는 자네를 전연 몰랐고, 서울에서 1990년대 이후에야 비로서 개인적으로 교분을 쌓게 되었지. 우리가 처음으로 개인적으로 교분을 나누게 된 것은 동창회에서의 만남이었고, 이어서 강맥회라는 바둑을 두면서 회장, 총무로서 점점 끈끈한 인연을 맺게 되었지. 우리는 나의 사무실에서 1부로 바둑을 두고, 이어서 2부로 동양화시합을 하고, 가끔은 3부로 우리집에 가서 술도 먹으며 토론도 하면서 사는 재미를 만끽하였었지. 가끔은 특별행사를 진행하여 남쪽나라로 날아가 제주도에서도 우정을 나누었고, 김영홍군이 근무하는 군산에 매년 봄에 내려가 김영홍친구가 특별히 마련해 주는 "우정의 떡회"(우리가 평소에는 잘 접하길 힘들 정도로 거대한 한 마리의 자연산 광어회를 이렇게 불렀지)를 맛보고, 2차로 바둑을 두고, 3차로 밤새 동양화를 하고, 한잠도 못자고 새벽녘에 월명산의 벚꽃 향기에 취해 보고, 목욕탕에서 사지를 벌렁 드러내고, 잠깐 눈붙이고 다시 서해안의 대천해수욕장등 명승지 곳곳을 둘러보면서 우리의 30대와 40대에 10년 이상의 끈끈한 우정을 나누었지. 자네는 항상 이러한 친구들과의 나들이행사에 피곤한 몸을 마다하지 않고 운전대를 잡고 졸음을 참으며 운전하는 우리들의 향도였고, 궂은일을 항상 도맡아 하는 봉사자였으며, 친구끼리의 만남에 항상 온화한 분위기메이커였으며, 그야말로 순하디 순하고 착하디 착한 친구로서 법없이도 살 친구였다네. 우리가 금강산을 가고 올때에도 금강호속에서 밤새 화투장을 만지며 적어도 7, 80까지는 같이 더불어 살줄 알았고, 금강산 만물상에서 대한민국 애국가대신에 강고 교가를 부를때는 우리는 참으로 가슴뿌득한 영원한 친구이자 강고인이었고, 대한민국 애국 시민이었지. 친구 희성아, 그때 우리는 금강산 옥류관앞에서 모두 같이 사진을 찍었고, 그 사진은 나의 사무실에 있어 이 순간에도 자네의 모습을 사진속에서나마 보고 있다네. 그 사진속의 7명의 사내들중 자네가 가장 인물좋고 키크고 건강한 남자중의 남자였는데(당시에 같이 갔던 김진백군과 홍광표군도 며칠전에 운동하면서 이 부분은 완전히 동의하더구만)... 어이하여 자네만 이제 볼 수 없게 되었는지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네. 그때에 우리들간에 다음에 기회가 되면 백두산에 같이 가기로 약속하였는데 어찌하여 그 약속을 다하기 전에 먼저 가버렸는가. 이 무정한 친구야. 희성아, 우리가 사이판에 갔을때는 자네가 훨훨 날아 친구들의 돈을 모두 따서 한번 뽐내면서 멋지게 참치회를 내기도 하였는데(김진백군과 홍광표군도 자기들을 불렀으면 같이 갔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피력하면서, 이 다음에도 연락주면 참석하겠노라고 하였네)... 어찌하여 두 번 다시는 그러한 솜씨를 발휘하여 친구들에게 한번 다시 멋지게 폼을 내보지 못하고 다시는 돌아올 길이 없는 먼길을 그렇게도 빨리 떠나게 되었는가. 지지난해에 승자로서 예약되어 내년 초에 보라카이해변에서 바둑을 두기로 약속했었는데 그 돈도 써보지 못하고 무엇이 바빠 그렇게 서둘러 가야만 했는가. 이 친구야. 희성아, 지난 해에는 우리는 산정호수에서 바둑을 두고, 명성산에 올라가다가 땅거미로 중간에서 내려오면서 다음에는 일찍 바둑을 끝내고 산정상에까지 올라가 궁예가 최후를 보낸 한많은 역사의 발자취를 둘러보고, 그 유명한 명성산의 억새풀도 감상하기로 약속하였는데 어이하여 별로 힘들지 않은 약속도 지키지 못하고 허이허이 머나먼 저승길로 떠나 가야만 했는가. (지난주에 억새풀축제가 있었다네) 이 친구야, 자네는 기억하고 있는가, 임진각을 경유하여 소떼가 지나간 통일대교, 도라산전망대를 둘러보고 눈앞에 펼쳐진 휴전선을 넘어 개성땅에서 바둑대회를 개최할 날이 앞으로 몇 년 뒤인지 서로 백가쟁명을 하고, 인근 유원지에서 송어회를 먹으며 바둑수담을 하면서 통일의 그날까지 우정을 나누어 평양 대동강변이나 모란봉에서 바둑을 두어보고 죽기로 약속하지 않았나. 그런데 이 친구야, 그러한 모든 약속을 하나도 지키지 않고 먼저 훨훨 떠나가 버렸구나. 우리 강맥회원들이 뭐 그리 잘못한 것이 있다고 먼저 떠나가 버렸는가. 주명준군이 자네를 마지막 떠나보내는 날에 임진각모임의 그때 사진을 미처 나누어주지 못하여 가져 오려다가 눈물이 앞을 가려서 차마 가져오지를 못했다고 말할 때 나의 가슴도 울고 또 울었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 희성아, 금년 3월에 개최될 바둑대회는 자네의 장모상을 당하여 연기되었고, 당시 장모님의 사망을 애도하면서도 우리는 자네와 부인 미애씨가 이제는 3년이상의 장모님 병수발 때문에 나누지 못한 인생의 즐거움을 오봇하게 즐길수 있을 것이라면서 두사람이 많은 시간을 같이 하기를 종용하다시피 권하였지. 그러면서 고생 끝에 낙이라고 축하아닌 축하도 해 주었지. 부인 미애씨는 자네도 아다시피 친정어머니의 치매로 지난 3년 이상을 착한딸로서 자네와 외출한번 제대로 못하고 병구완하느라 참으로 고생이 많았는데... 자네가 그래도 몇번은 오봇하게 같이 좋은 곳으로 나들이라도 시켜 주고 떠났어야 하는데... 어머니병구완에 지친 아내에게 그보다 열배 백배의 충격과 앞으로 그 많은 날들의 모든 고생을 그대로 혼자 맡겨두고, 부부로서 오봇한 여행한번 못한채 불귀의 객이 되어 떠난 자네는 참으로 아내에게 몹된 남편인 것을 아는가, 이 친구야. 연기된 강맥회 모임을 4월 식목일연휴에 변산반도의 채석강에서 개최하기로 자네가 준비를 모두하고 같이 갈 것으로 알았는데 가기 전날밤에 전화로 알려온 " 나, 암이래" 하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에 그저 할 말을 모두 잃었다네. 희성아. 자네가 이미 수술이 안될 정도로 암세포가 전신에 전이된 상태에서 투병생활을 본격적으로 하기에 이르렀을 때, 주위에서 그러한 절망적인 마지막 순간을 여러번 경험해 본 나는 자네가 죽음을 재촉하는 약물투여등의 방법에 의한 항암치료보다는 아내와 자녀들과 먼저 이별여행을 하고, 그리고 그 연후에도 다소나마 힘이 남아있다면 우리 강맥회원들과 보라카이로 마지막 이별여행을 할 것을 간접적으로 권하였으나 자네는 "암을 이길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어 차마 노골적으로 강권할 수 없었다네. 돌이켜 보면, 이별여행이라도 강권하여 며칠간이나마 아니 단, 하루일지라도 술이 안되면 물이라도 나누어 마시면서 그동안의 삶의 궤적에서 슬프고 힘들었던 자국을 보듬고, 즐거웠던 시절의 회포를 풀면서 마지막 우정의 삶을 공유하고 보냈었어야 하는 아쉬움뿐이네. 희성아, 자네가 경희대병원으로 입원하여 사실상 죽음을 맞이하러 갔을 때, 우리 강맥회원들은 경희대병원에 집결하여 자네를 마지막으로 보게 되었지. 자네의 그 건강한 육신은 이미 암세포에 의해 갈갈이 갉아먹혀 보기에도 흉측하였고, 자네의 송장같은 나약한 손을 잡고 있자니 그저 눈앞이 막혀 오고 할말을 잃어버렸는데, 자네는 우리에게 " 이제 더 나빠질 것이 없으니 나아질 것이다"고 하여 자네의 절규를 듣고 있자니 눈물이 나올 것 같고, 자네에게 차마 눈물을 보일수 없어 병실문을 나올 수밖에 없었고, 순하디 순한 자네같은 사람이 천국에서 무어 그렇게 필요하여 일찍 불러가는지 하늘이 원망스러웠네. 희성아. 우리는 강맥회의 바둑외에도 청죽회모임으로 산정호수, 명성산 기슭을 참 많이 갔었지. 자네의 집과 나의 집이 가장 가까이 있어 자네와 나의 차량을 교대로 타고 다니며, 자식놈들 크는 걱정을 하고, 살아가는 애기를 하며 자유로를 내달리고, 의정부를 거치고, 일동 스키장옆을 새볔녁에, 또 한밤중에 쏜살같이 오고 갔지. 아마도 내평생 몽베르로 가게될 때마다 자네와의 그러한 뜨끈한 우정과 추억을 잊을 수가 없을 것이네. 먼 훗날, 내가 저세상에서 자네를 만나게 되면, 자네없이 다닐때의 마음의 고적감을 다시 토로하며, 우리 생노병사의 인간철칙을 저주하는 술한잔 하세나. 친구야, 암으로 쓰러지기 직전의 마지막 세 번의 라운드에 홍광표군과 내가 모두 참여하였고,최종 두라운드에는 장준혁군이 1박 2일동안 같이 하였더구나. 백송가든에서 2004. 3. 20 토요일 저녁에 갈비를 먹고 밤새 동양화를 들여다 볼때 자네가 어째 배가 쏠쏠 아프다면서 설사가 난다며 화장실을 여러번 들락거릴때에도 우리는 설마 사태가 이렇게 될 줄은 전연 모르고, 인정사정없이 쓰리고를 연발하여, 평생 화내지 않던 자네가 누구누구 때문에 노상 쓰리고와 광박, 피박을 맞는다는 말을 하기에 이른 것이, 자네의 속을 갉아먹는 암세포가 내밷는 말인줄은 전연 짐작도 못했었네. 희성아, 밤새운 다음날, 3월 21일 일요일에 후반 9홀에서 자네가 41타를 친 나를 꺾고 40타를 치면서 "나인기준으로 라이프베스트"라고 좋아할 때, 우리들은 자네와 평생 이러한 재미난 게임을 계속할 줄로만 짐작하고, 앞으로 나를 패댕기칠사람이 바로 자네라고 다른 친구들이 격려해 주면서, "앞으로 자주 밤새워 화투치고 다음날 쇠몽둥이를 휘두르자"고 말하였으니 우리가 얼마나 한치앞을 내다 보지 못하는 미욱한 인간인지 이제야 알겠구나. "친구야, 어찌 나인기준으로만 나를 이기고 그렇게 빨리 떠났나, 이 친구야, 오래오래 갈고닦아 18홀 기준으로 여러번, 아니 단, 한번만이라도 나를 꺽고 가야하지 않았나" 희성아. 자네가 병상에 눕게 되었을 때, 나는 자네에게 "언제 어느 시간이라도 희성이가 원하면 산정호수C.C 에 같이 가서 라운딩하겠다"고 제의하면서 단한번이라도 마지막 라운딩을 하고 자네를 보내기를 간절히 희망하였으나 자네는 "병이 나은뒤에 그때 가자"고 답하여 나의 속마음은 이미 암세포가 전신에 퍼져 수술이 안되는 것을 알고 있자니 그저 울고 울 수밖에 없었다네. 희성아. 영안실에서 박영상군을 통하여 자네가 교수형님에게 인생에서 가장 즐겁고 행복한 때가 "푸른 잔디에서 친구들과 골프를 칠때"였다고 하였다는 말을 전해듣고, 우리의 가슴은 더욱 아팠다네. 자네가 그렇게도 즐거운 공간과 시간이 "골프장에서의 친구들과의 라운딩"이라면 앞으로 우리가 한 2십년 더 살아가면서 수백번은 더할수 있을터인데... 무엇이 급하여 그렇게 일찍이 먼저 가버렸는가. 아니, 어느 못된 신이나 귀신이 동무하려고 꼭 자네를 점지하여 데려가 버렸는가. 가장 착한 자네가 그렇게도 탐이 났던가 말이다. 이 친구야, 나는 살아서 앞으로 산정호수 몽베르에 수십번, 이니 백번을 더 갈터인데... 그때마다 같이 다니던 자네를 어찌 잊으래야 잊을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같이 뛰놀던 여러 친구들도 어찌 자네를 잊을수 있으리요. 그저 안타깝고 안타까운 마음이 울어나 눈앞을 가린다네. 희성아 우리 한달에 한번씩 가던 청죽회 친구들이 자네의 그 말에 모두 가슴이 미어져 "산정호수 몽베르 골프공을 자네와 같이 보내자"고 의견일치를 보아, 자네의 유골함 바로옆에 나의 골프가방에서 급조한 "몽베르 골프공 4줄, 12개"를 정성스레 담아서 놓아 두었으니 자네의 영혼이 밝은 달밤에 가끔은 벌떡 일어나 라운딩을 하면서 우리 청죽회원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부르면서 몽베르언덕에서의 즐거웠던 "그때 그 시절"을 기억해 주기 바라네. 희성아 강화의 묘소에서 우리는 너를 마지막 떠나보내면서 쏟아지는 빗속에서 강고 교가를 불렀었지, 그러나 금강산에서의 우렁찬 강고 교가는 아니었고, 모두가 힘빠지고 쓰러지는 소리의 교가였네, 금강산에서의 교가는 "삶의 예찬"이었고, 묘소에서의 교가는 "죽음과 이별의 아픔"을 토로하는 단심가였지. 금강산에서의 그날은 무척이나 맑았고 우리는 생의 활기에 차 있었으나, 자네가 한줌 가루로 바뀌어진 강화에서의 그날은 그저 속절없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인생의 무상함만을 탓할 수 밖에 없는나약한 인간군상의 우리였다네. 그만큼 자네는 우리에게는 소중하였고, 귀중하였던 친구였다네. 이 친구야. 희성아 자네를 천국으로 이끌어 줄 목사님의 말씀중에 우리에게 가장 가슴 닿는 말이 있었지, 그 목사님도 부친이 일찍 사망하였는데, 어느날인가 반백의 어른이 학창시절에 방황하고 있는 자신을 찿아와 " 자네 부친이 나와 친구였다네, 자네 부친은 어떠 어떠한 사람이었다네" 라면서 그 목사님을 격려해 주셨고, 그 말에 점점 희미해지는 부친의 기억을 떠올리며 인생을 살아가는데에 외롭지만은 않았다고 하는 말씀과 더불어 자네의 친구들인 우리들에게 " 가끔은 한번씩 자녀들을 찿아주며 자라는 자녀들에게 부친애기를 해 주기를 바란다"고 하셨었지. "아, 우정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구나" 자네가 죽었다고 하여서 반드시 우정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11기 동기들, 강맥회원들이나 청죽회원들이 이 땅에서 삶을 다하는 그날까지 자네를 기억해 주고, 자네의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자네가 얼마나 우리들과 같이 인생의 단맛, 쓴맛을 같이 하면서 사내다운 인생을 살다가 간 소중한 친구였고, 가족, 특히 딸 소영이를 얼마나 사랑하여 딸넴이가 자지않고 기다릴때면 그 딸에게 다정하게 전화해준 좋은 아버지였는지에 대해 가끔은 들려주어야 겠지. 그야말로 우리의 심금을 울려주는 목사님의 말씀이었고, 천국에 있는 자네가 목사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자네의 어린 자녀들을 부탁하는 말로 받아들였네. 우리 강맥회원들이 뜻을 모아 강맥회 적립금중 일정금액을 자네의 토끼같은 딸 소영이가 고등학교에 입할할 때 등록금으로 쓰도록 정기예금을 하여 통장으로 자네의 부인에게 얹그제 토요일에 식사를 같이 하면서 전해 드렸네. 우리의 작은성의이지만 우정의 정표로서 기꺼이 받아 주기를 바라네. 우리가 자네의 부인과 자녀들을 기억하여 인생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도울일이 있으면 최선을 다하여 힘자라는데까지 돕도록 하겠네. 옛말에도 "덕은 외롭지 않다"는 말로 "덕불고"( 德不孤)"가 있드시, 자네같이 "덕"이 있는 친구는 이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저 세상에서도 외롭지 않을거야. 희성아 우리 11기 친구들이 자네의 투병기간중에 산에서 캐낸 천연 상황버섯이나 뽕잎을 강릉에서 공수하여 자네의 회복을 기원하였으나 그마저 끝까지 먹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였다니, 그저 하느님이 무심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구나. 하늘은 착한 사람을 먼저 불러다 크게 쓰신다는 옛말이 있어, 이제 우리는 착하게 살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은 모두 하고, 욕도 하고 살아야 이곳에서 오래 살수 있을 것 같구나, 그래서인지 자네를 추모하는 친구들이 너무나 애틋하게 "나쁜놈"이라고 욕을 하였더구나. 친구 희성아, 먼저 절받은 조상이 되었으니 친구들이 너를 먼저 갔다고 탓하고 욕하는 것도 모두 참고 받아 들여야지 어떻게 하겠냐, 너는 죽어 말을 못하잖니. 변호사인 내가 대신 말해 줄께, "나도 가고 싶지 않았다, 너희들과 오래동안 바둑두고 화투쳐서 쓰리고, 광박, 피박, 따다블도 하고, 명성산 기슭에서 쇠몽둥이 휘두르고, 군산의 떡회에 소주한잔 주고 받으면서 살다가 아들 현석이놈 장가 보내 며느리도 보고, 딸년 소영이년 시집보내어 외손주도 안아보고, 늙어가는 마누라 김미애한테 노상 찬밥대접 받고 잔소리 듣으면서도 친구들이 좋아 주말마다, 밤늦게까지 이곳저곳을 휘젖고 다니다가, 막상 집에 들어가면 가려운 등을 긁어주는 사람은 그래도 평생 잔소리하며 살아온 마누라 김미애밖에 없구나, 친구라는 놈들은 피박쒸워 돈 따먹고, 잔디 밑둥이 더 잘파서 돈 따먹기나 하는 인정사정없는 놈들이지. 두 번다시는 그놈들과 전화하지 않고, 만나지 않기로 다짐하면서도 그래도 다음날이면 그놈의 친구들이 보고싶고, 전화오지 않으면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다가 기다림에 지쳐서 전화하여 어째, 무슨 일이 없냐고 슬쩍 물어도 보고, 모이자고 하면 한두번 빼다가 못이기는 척 하고, 마누라에게는 적당히 둘러대고 대문밖을 나서면서 휘파람불며 모이는게 우리였고, "우리가 남이가" 하면서 살아왔고, 살아간다고. 특히 "우리가 남이가"는 나, 이희성의 전매특허이므로 다른놈들은 공짜로 쓰지 말아. 나도 친구들과 개성에 가고, 평양에 가고, 백두산에 가고, 사이판에 가고, 보라카이에도 가고, 그렇게 살다가 돈이 떨어질 나이가 되면 100원짜리 고스톱도 치면서 벽에 똥칠할때까지 살고 싶었는데.... 먼저 가서 참으로 미안하다. 진짜 미안하다. 친구들에게도 미안하지만 더 미안한건 나의 어린 새끼들, 아버지손이 아주 필요한 고등학생인 현석이와 아직 어린토끼인 딸 소영이에게 미안하다. 사랑하는 아내 김미애에게는 미안해서 도저히 할말이 없다. 그저, 여보, 나 없어도 어린 두자식들, 아비없는 자식으로 흉보이지 않도록 잘 키워주오. 내가 하늘나라에서나마 당신과 두아이들의 앞날이 잘 되도록 기도 드리겠오. 앞으로 그 많은 날들, 눈물을 흘릴 당신에게 참으로 미안하오. 그리고, 강릉에 계신 늙은 어머님, 막내자식으로 어머니보다 먼저 떠나서 어머님 가슴에 한을 남겨드린 이 불효자 때문에 식사도 못하시고 주무시지도 못하고 매일 울고 계실 나의 어머님, 그저 용서를 비옵니다. 저보다는 저의 처와 아이들이 더 불쌍하니 어머니께서 며느리와 아이들에게 용기를 주세요. 하늘나라에서 어머님을 뵈올 그때까지 내내 건강하시고, 가끔은 며느리와 손주들을 챙겨보아 주시고, 하늘나라에서 다시 뵈오면 그때 저랑 며느리와 손주들 얘기를 하도록 하셔요. 어머님, 만수무강하십시오. 친구들아, 너희들은 늦게 늦게 오거라, 가급적이면 술많이 먹지말고 담배많이 피우지 말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다가 오거라. 건강검진도 자주하고, 어디 빽을 쓸곳이 있고, 통할 곳이 있으면, 특히 오래살게 해 준다는 영험하신 귀신들에게 붙어서라도 오래 오래 살다가 오거라. 그래도 빨리 오고 싶으면 와서 나랑 놀자, 이곳에도 먼저온 친구들이 여럿이 있으니 그렇게 외롭지만은 않고, 이곳에도 있을 것은 다있다. 연사도 있고, 따다블도 있고 광파는 놈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푸른 초원도 있다. 다만 올때는 내가 니들과 같이 제일 많이 가던 몽베르의 공짜 볼을 한박스갖고 오거라이, 아니, 나는 오비가 가끔 있으니 한박스 더 갖고 오거라이, 알았나. 너희들은 살아 있으나 죽으나 나의 영원한 친구이다. 한번 친구이면 영원한 친구이다. 친구들아!, 오래오래 있다가 다시 만나자. 만날때까지 안녕." 희성아 지난 아픈 추억일랑 모두 잊고 저세상에서 편희 쉬면서 우리가 며칠후 요단강 건너서 자네곁으로 갈 그날까지 자네의 영혼이 자네의 사랑하는 처 김미애씨와 아들 현석군과 딸 소영이의 앞날을 지켜주며 인도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일세,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 불쌍한 우리 친구 이희성군의 영혼을 인도하시어 푸른초장에 누이시게 하여 그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시고, 그의 남은 가족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감에 있어서 사랑하는 남편, 아버지와 쌓아왔던 아름다운 추억을 소중하게 기억하면서 정신적으로 평안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고, 물질적인 면에서도 부족함이 없도록 곳간을 가득 채워주시기를 주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 - 삼가 이희성군의 영전에 깊이 머리숙여 고인의 명복을 빌며, 그 유족들의 앞날에도 좋은 일이 많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2004. 10. 18 강고 11기 동기생으로서 강맥회 회장이자 청죽회 회원으로서 고인과 이웃해 10수년간을 더불어 살아왔던 최선교가 너무나도 갑자기 친구들 곁을 떠나가 천국에 있는 잊지못할 고인에게 이별한지 1개월만에 가슴아픈 이 편지를 뛰웁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