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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회 동기회

자유게시판 시장님의 세계사 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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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심상익
댓글 0건 조회 502회 작성일 13-04-20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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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을 부른 마르틴 루터 사건

“1521년 4월 17일, 독일의 보름스
신성로마제국 의회에 선 루터
아주 인상적인 회의였다.
1521년 4월 17일, 아우구스티누스파의 수도복을 입은 한 남자가 회의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값비싼 옷을 입은 제후들, 즉 직위를 나타내는 배지를 달고 그에 걸맞은 색깔 옷을 입은 교회의 고위 성직자 주교,
대주교, 추기경, 서기, 군인들이 회의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그는 1519년 10월 독일의 왕으로 선출되었고
교황에 의한 황제 대관없이 황제로 인정받으며 서양 최고 권위자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지난 600년에 걸쳐 등장한 4명의 카를 황제에 이어 다섯 번째 카를 황제,
즉 카를 5세(1519~56)가 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의 제국의회가 열렸다.
새로운 황제 카를 5세 아래 처음으로 크고 작은 권력자들, 기사들, 그리고 시민 대표들이 모였다.
아무리 대학 교수라해도 일개 수도사가 그런 회의에 참석한다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었다.
보름스 제국의회에 참석한 수도사 마르틴 루터(1483~1546) 박사는
이미 오래 전부터 세인들에게 관심의 대상이었으며 비록 유럽까지는 아니어도 독일 정치의 큰 틀을 함께 이끌던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교수로 있던 작센의 대학 도시 비텐베르크에서 보름스로 왔다.
그 여행은 승리의 행진이었다. 사람들은 4월 16일 보름스에 도착한 루터를 환영했다.
루터는 그곳에서도 사람들이 자신을 존경하고 있으며 자신의 뜻에 공감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4년 전에도 같은 사건으로 제국의회에 선 적이 있었다.(주1:
사년전인 1517년, 루터는 면죄부 판매에 반대하며 ‘95개조의 반박문’을 내놓았다.
그로인해 그는 교황청으로부터 파문 칙령을 받지만 불태워버리고, 다음해 3월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에 의해 추방당한다.)
그는 보름스 사람들의 환대가 마냥 자랑스럽거나 기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지금이 자신의 인생에서 매우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기분도 썩 좋지는 않았다. 100여 년 전에 신학자이자 대학 교수인 얀 후스가
보름스 제국의회와 비슷한 회의에 참석했던 사실을 떠올였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제국의 지배자는 지금의 마르틴 루터의 경우처럼 교회를 비판한 얀 후스를
치외법권으로 보호했다.
교회 비판자의 자유로운 귀향과 안전을 보장한다는 의미였다.
그런 조처가 있었음에도 얀후스는 곧바로 감금되었고 결국 이단자로 단죄되어 화형당하고 말았다.
이런 후스가 루터와 다른 점은 제국의회가 아닌 콘스탄츠 공의회의 심판을 받았다는 것 뿐이다.

제국의회는 콘스탄츠 공의회와는 달리 신학적 질문에 대한 정치적인 의미보다 신학적 질문 자체에 훨씬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어쨌든 교황은 두 가지 교령으로 루터에 대해 공식적인 판결을 내렸다.
그 교령은 루터를 포함해 그를 이교도로 규정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모두 파문시킨다는 내용이었다.
이제 그들은 교회 공동체 밖에 서 있었다.
아무리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해도 당사자들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을 시작하면
기독교 신자라는 개인적인 문제를 접어두더라도 문제가 있는 판결이었다.
아마 제국의회가 마르틴 루터를 얀 후스처럼 대하려는 유혹을 느꼈던 건 아니었을까?
오직 마르틴 루터만 그런 상황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홀의 입구에 서 있던 푸룬츠베르크의 용병대장 게오르크는 “수도사님, 수도사님, 당신은 어려운 길을 가시는군요” 라고 말했다.
‘콘스탄츠에서의 후스’와 ‘보름스에서의 루터’의 상황은 분명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달랐다.
마르틴 루터는 어느 정도 안전이 보장된 사람이었고, 어디에서나 공감을 얻었으며 존경받고 있었다.
그는 여행하는 동안, 그리고 보름스 시민들의 환대를 받으며 그런 분위기를 느꼈다.
그러나 루터의 가장 중요한 후원자는 뭐니뭐니 해도 군주, 즉 작센의 선 제후였다.
작센의 선제후, 현공 프리드리히는 당시 독일에서 가장 명망 있는 제후였다.
사실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1519년에 카를 5세 대신 황제로 선출되었을 것이다.
그가 차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자리가 보장되는 독일 왕의 자리를 거절했다는 사실은 그의 현명함을 보여주는 일례일 수 있다.
또한 무엇보다도 마르틴 루터를 둘러싼 갈수록 심각해지는 논쟁을 얼마나 신중하게 다루었는지를 보면
그의 현명함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면죄부 판매가 부른 종교개혁의 목소리
루터 논쟁의 파고는 1517년 이래 더욱 거세졌다.
그 논쟁은 루터가 소위 면죄부 판매에 반박 성명을 내면서 시작되었다.
교회는 오래 전부터 면죄부를 판매하여 교황과 로마 교황청에 돈을 조달하고 있었다.
면죄부 판매는 16세기 초 르네상스 시대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을 계기로 관례화되었다.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은 메디치가 출신인 교황 레오 10세에게는 모든 돈줄을 총동원할 만큼 가치 있는 일이었고,
그 중 상대적으로 왕권이 가장 약했던 독일에서의 면죄부 판매는 중요한 돈줄의 하나였다.
마르틴 루터는 교회의 장사를 날카롭게 비판하였고 결국 면죄부 판매자들과 격렬한 논쟁에 빠졌다.
논쟁의 파장은 갈수록 커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더 이상 면죄부 판매 동기 자체가 아니라 기독교라는 종교의 근본적인 문제,
특히 교회의 근본적인 문제가 논쟁의 쟁점이 되었다.
이제 그와 같은 문제에 대해 철저하게 논할 수 있을 만큼 시대가 성숙한 것이다.
이미 100여 년 전에 사람들은 교회를 그대로 유지할 수 없을 만큼 개혁이 절박한 상태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얀 후스를 화형에 처했던 콘스탄츠 공의회(주2)가 열린 이유였다.

(주2: 1414~1418년까지 4년 간 45회기에 걸쳐 열린 콘스탄츠 공의회는
교회 일치 문제와 함께 대립교황 등으로 교회에 실망한 개혁가들의 이단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두 가지 난제를 안고 있었다.
그런 문제들을 다루면서 교회 내적 생활에 대한 쇄신 문제까지 거론되었다.)

그러나 콘스탄트 공의회에서도 개혁에 진척이 없었고, 20여 년이 지나 또 한번의 공의회를 열었지만 결국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교회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점점 커졌지만 개혁의 기미가 없었던 데에는 교황들과 로마 교황청에 책임이 있다.
그들은, 성직과 교회 재산이 교회 고위 성직자 몇 명의 개인적인 행복과
사회적 명성 그리고 정치적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쓰였던 시대의 수혜자들이었다.
교회의 재산과 성직은 마땅히 종교와 관련된 일에 쓰여야 하지만,
그들에게 종교는 단지 경제적 수단이었고 핑곗거리였으며 일상일 뿐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교회가 사치스런 생활에서 벗어나 본연의 종교적인 자세로 돌아가야 한다는 개혁의 목소리가 커졌지만
15세기의 현실에서 종교개혁은 주된 관심사가 아닐 수도 있었다.
개혁이란 시대정신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때는 르네상스였다.
세계와 종교에 대한 중세적 관념과 중세적 도덕관이 해체되었고,
비록 삶에 여유가 있었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이지만 그 자리에 개인의 행복 추구라는 관념이 들어섰다.
그런 가운데 교황들도 종종 아내와 자식을 두고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개인적인 행복을 추구할 수 있었다.
교회의 고위 관직자들만 그런 생활을 영위한 것은 아니었다.
15세기 들어서 정치, 경제적으로 많은 발전을 한 독일과 이탈리아의 힘 있는 도시들의 세속 제후와 기사, 부유한 시민들 역시 다를 바 없었다.
교황과 추기경, 주교들의 비도덕적인 생활태도는 공공연하게 비난받았고,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어 교황이 교황청의 유지비를 요구하는 뻔뻔스런 일도 벌어졌다.
사람들은 불쾌한 기분을 넘어 비참함을 느꼈다.
성직자들에게 실망한 사람들은 신학자들에게도 별 도움을 기대할 수 없었다.
몇백 년 전부터 그들은 틀에 박힌 방법으로 종교 문제를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부 주제를 다루면서 관련된 성서 구절을 억지스럽게 해석하는가 하면 문제의 의미와는 관계없이 소모적이고 격렬한 논쟁을 벌이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런 상황에서 세속과 동떨어진 이론가들만이 종교 논쟁에 열중했을 뿐 보통 사람들은 그런 논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그런 이유들로 교황 레오 10세 역시 처음에는 루터와 그의 반대자들의 격렬한 공격을
“수도사의 끊임없는 말싸움” 정도로 무시하고 마르틴 루터를 인품이 다른 신학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루터도 다른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종교 문제를 틀에 박힌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나쁜 습관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정열적인 기질을 지녔고 전통적인 신학자들과는 다른 대중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교회 상황에 대한 분노와 불만을 대중들이 이해하기 쉽게 정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의 생각을 정확히 짚어냄으로써 그들의 동의와 공감을 얻었다.
루터는 특히 독일의 권력자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그는 독일 귀족들에게 보내는 글에,
교회의 권력은 세속의 권력 아래에 있으므로 종교적인 문제일지라도 최종 결정권은 세속 당국의 몫이라고 했으며
로마교황청이 요구하는 많은 세금은 불법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그것으로 반쪽짜리 주권을 가진 독일의 지역 제후들에게 지배권을 강화할 수 있는 중요한 논쟁거리를 제공했다.
그런 상황에서 교회가 루터에 대해 파문을 언급하며 위협한 것은 잘못된 대응이었다.
교회 당국의 조처는 단지 가톨릭 교회의 개혁을 요구하고 교황에게 충성스런 편지를 썼던 루터를 자극했다.

루터는 주변의 동조에 힘입어 점점 더 극단적으로, 점점 더 거칠게 교회에 대응했다.
그는 전체 교회를 복음에 반하는 조직이라고 주장했으며, 반박문 표지에 교황을 “반그리스도”로 표현하기까지 했다.
당시 그런 표현은 가톨릭 교회의 수장에게 가해진 최고의 모욕인 동시에 신성모독이었다.
그는 교황의 파문장을 공개적으로 불태워 버렸다.
그의 그런 행동들은 대중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마르틴 루터의 개혁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생겼는가 하면, 가톨릭 교회가 개혁의 움직임에 강하게 대응하기도 했다.

루터 문제의 해결책을 찾기 위해 고심하던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도움으로 선출된 황제 카를 5세에게 대관식 후 소집될 제국회의 의사 일정에 루터 안건을 상정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카를 5세는 약속을 지켰다.
교황이, 파문당한 사람은 서양에서 가장 명망 있는 의회의 연단에 정식으로 설 수 없다며 주장했지만 소용없었다.
카를 5세는 루터 박사”를 아우크스부르크 제국 의회로 초대했다.
마르틴 루터가 제국의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직 미지수였다.
카를 5세는 단지 루터 사건을 독일 제후와 교황 양쪽을 고려해 처리하고 싶었을 뿐이다.
게다가 그는 사려 깊은 사람도 아니었다.
또 당시 카를 5세는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직위만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이미 16세기 초부터 명목뿐인 그 직위만 가지고는 권력을 유지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당시의 네덜란드와 오늘날의 베네룩스 3국을 아우르는 복합 국가의 제후였다.
또한 그는 합스부르크가의 후예로서 오늘날의 오스트리아 지역을 포괄하는 제국 남동쪽 지역의 지배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거대한 신세계 에스파냐를 지배하는 왕이었고, 자신의 제국의 태양은 지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말하던 지배자였다.
그러나 이제 카를 5세는 권력만큼이나 무력감도 함께 느껴야 했다.
유럽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그의 제국이 끊임없이 적의 위협을 받았기 때문이다.
서쪽의 적은 프랑스였다.
프랑스는 카를 5세의 세계 제국이 자신들을 포위하고 있다고 느꼈고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또 동쪽에는 터키가 있었다.
터키는 지난 200년 동안 무적의 국가였고 중부 유럽을 향해 거침없이 밀고 들어왔다.
터키인들은 자신들의 땅과 합스부르크 점령지 사이의 마지막 바리케이드인 헝가리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제국 남쪽에서는 아프리카 지중해 연안의 해적 국가들과 충돌했고 제국 내에서는 에스파냐가 반란을 일으켰다.

카를 5세는 제후들과의 협정을 통해 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약해진 황제의 위상을 다시 강화하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루터와 뜻을 같이하는 독일 제후와 교황 양쪽 모두의 지지를 얻어야 했다.
문제는 바로 카를 5세의 태도에 있었다.
루터 안건은 제국의회에서 다룰 수많은 문제 중 부수적인 항목에 불과했고,
실제로도 사람들은 루터 안건이 부수적인 사안으로 취급되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카를 5세는 현공 프리드리히에게 제국의회에서 루터 문제를 다루기로 약속했지만
한참 동안 우왕좌왕하다 제국 제후들이 긴박하게 요구하자 그때서야 결정을 내렸다.

루터는 보름스 제국의회에 바로 참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보름스로 오기 전 , 그러니까 보름스 제국의회가 열리기 전에
교황의 사절인 추기경 지롤라모 알레안드로가 루터를 유죄 판결로 이끌어 내기 위한 연설을 했다.

이제 프리드리히 선제후와 함께 많은 사람들이 희망했던 일
즉 교회 수장과 성직자 개혁’에 대한 논쟁이 조정되기를 바랐으며,
그것은 콘스탄츠 공의회의 목표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여지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기독교의 분열이 시작되다
루터의 동조자들은 루터 문제가 잘 해결되기를 바랐고 교회 개혁을 원했다.
그들과 루터는 교황의 대표자들과 루터의 주장에 대해 토론하고 의견을 교환하기를 기대했지만 그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트리어 대주교 측의 성직자인 요한 에크가 루터를 심문했다.
그는 루터에게 그의 입장을 설명하거나 변호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요한 에크는 “네”, “아니오” 로만 대답할 수 있는 다음의 단 두 가지 질문만 했다.
“당신 앞에 놓여 있는 글은 당신의 것입니까?”. “그 내용을 철회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루터는 자신의 안건이 그렇게 처리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첫 번째 질문에 “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두 번째 질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저촉되지 않게 대답할 수 있도록 잠시 유예의 시간을 갖도록 해달라고 말했다.
그날 제국의회에서 루터의 안건은 그렇게 끝났고 제국의회는 곧이어 다른 안건을 처리했다.
황제는 루터에게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으며 주변사람들에게 그 정도의 남자라면 자신을 이단자로 만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날 루터에게 기회가 한 번 더 주어졌다.
루터는 다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할 준비가 되어 있냐는 질문을 받았다.
어떻게 행동할지 미리 생각하고 있던 그는 인상적인 연설을 했다.
그가 독일어는 물론 라틴어로도 연설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당시 사람들 모두가 그처럼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자기를 변호하면서
황제와 다른 모든 참석자들에게 자신을 반박하려면 성경에서 근거를 찾으라고 말했다.
또 만약 그들이 그럴 수 있다면 곧 자신의 주장을 철회할 것이고 누구보다 먼저 자신의 책들을 불구덩이에 집어던질 것임을 공언했다.
예상했던 연출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 참석한 정치가들은 루터의 토론 방식처럼 신학적인 질문을 하며 일을 확장시키고 싶어하지 않았다.
황제는 이제 루터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는 문제에 대해 간단하게 대답하길 원했다. “네” 혹은 “아니오” 로....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왔다.
루터는 자신의 명제가 성경에 근거해 반박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취소할 수 없다고 말했다.
교황과 공의회는 루터에게 권위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이 판단을 잘못하는 일은 아주 빈번했다.
루터는 그런 공의회의 교황 앞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도와 주소서, 아멘!”
그는 결국 퇴장 명령을 받았다.
이로써 16세기 전반에 걸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서구 기독교의 분열이 시작되었다.
지체된 교회의 개혁, 면죄부 판매에 대한 불쾌함, 도시의 새로운 자의식,
루터의 첫 번째 비판에 대한 로마 교황청의 잘못된 대응,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신학적 논쟁을 이용했던 독일 제후들과 황제,
루터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보름스 제국의회의 불행한 결과.
이 모든 것은 더 이상 탈출구를 찾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에서는 루터가 교회를 개혁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때 만약 제국의회가 루터의 입장에 대해 논쟁하려 했다면, 또 루터에 대해 다소라도 호의가 있었다면 개혁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다시한번 그러나 이번에는 황제가 배석한 제국의회가 아닌 작은 모임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은 루터에게 주장을 철회하도록 설득했다 하지만 제국의회에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기를 공개적으로 거부하고 그 이유까지 설명한 그가 아닌가?
황제 카를 5세가 마지막 조처로 루터에게 3주네에 보름스를 떠나라고 명령했다.
카를 5세는 보름스 제국의회의 폐회날인 5월 25일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신성로마제국에서의 추방 명령을 담은 칙서를 공포했다.
루터가 보름스 제국의회에 참석한 지 6주만의 일이었다.

1122년 보름스 협약(에서 황제와 교황의 성직 논쟁이 타협된 후
거의 정확하게 400년 만에 같은 장소에서 서양 교회의 분열이 시작되었다.
루터 사건의 처리와 결말로 결국 패배자만이 남았다.
서양의 기독교는 분열되었다.
루터의 추종자도 교황도 다른 종파를 극복하지 못했다.
가톨릭 교회는 트리엔트 공의회(주3)에 이르러서야 개혁을 이루었다.

(주3: 1545~63년까지 이탈리아 북부 트리엔트 지방에서 19차례에 걸쳐 진행된 가톨릭 종교 회의이다.
1545년 12월 13일 겨우 1명의 교부와 3명의 교회 특사가 참석한 가운데 개회식을 가졌을 때
그것이 가톨릭 근세 교회사에 있어서 최대의 사건이 시작이 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신교의 종교개혁에 대한 교회 최고의 교두권으로부터 나온 대답이었다.
그것은 가톨릭의 신앙 교의에 대한 명백한 선언이었고, 동시에 가톨릭 교회 내부의 자각이요 참된 종교개혁이었다.)

만약 가톨릭 교회가 개혁을 50년 더 일찍 이루었다면, 아마도 루터는 새로운 종파의 창시자가 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또다시 루터의 추종자들은 사소한 것을 꼬치꼬치 따지는 종교 논쟁의 전통을 계승했다.
교황권의 권위로부터 자유로워진 그들은 새로운 종파로 분리되어 또 다시 서로 격렬하게 싸우기 시작했다.
권위를 다시 세우고 제국을 다시 결속시키고자 했던 황제는 종교적인 공동체를 포기했고 정치적인 공동체까지 상실했다.
이런 종교 분열은 1648년 30년 종교전쟁의 결과물인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으로 이어지며
독일 민족이 이룬 신성로마제국을 실질적으로 해체했다.

유럽에서 16세기부터 17세기 중반에 걸쳐 일어난 종교전쟁과 시민전쟁으로 인해
아일랜드와 루마니아의 지벤뷔르겐,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의 발트 3국과 프랑스 사람들은 전 재산뿐만 아니라 종종 생명까지 잃었다.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루터와의 더 많은 대화가 이루어졌더라면 참혹한 전쟁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16세기를 살았던 평범한 사람들은 황제 카를 5세에게 감사할 수도 있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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