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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4대 악녀(惡女) <2> 여태후(呂太后)

작성자 백충기

등록일 2017.11.21

조회 4,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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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4대 악녀(惡女)

<2> 여태후(呂太后)
◇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비(妃)/BC 240년 전후/ 아명 여치(呂雉)

여태후의 아버지 여문(呂文)은 산동(山東) 출신의 유지로, 가족들을 데리고 유방(劉邦)의 고향인 패현(沛縣)으로 이사를 하여 딸(아명 呂雉)을 낳는데 이 딸이 장성하여 유방과 결혼하게 되고 훗날 유방이 한(漢)나라의 왕이 되자 태후(太后)가 된다. 여태후는 두 아이를 낳는데 첫째가 후일 노원공주(盧元公主)로 불리게 될 딸이고, 둘째가 황제를 계승하게 될 유영(劉盈)이었다. 유방과 여치는 결혼 후 평범한 농민들의 삶을 살았는데 젊은 날 유방은 가정에 헌신적인 남자가 아니라 바람기가 많고 주색잡기에 능한 한량(閑良)풍의 인물이었다고 한다.


진(秦)나라 말기, 농민 반란이 일어나자 항우(項羽)와 손을 잡은 유방(劉邦)은 진나라를 멸하고 다시 항우와 치열한 패권다툼을 벌이게 되는데(楚漢戰) 전쟁 초기에 항우의 병사들에게 포로가 되었던 여치는 이 기간 내내 초나라의 군영에 인질로 잡혀 있으면서 온갖 굴욕과 멸시를 받아야 했다. 이때에 받은 심리적인 타격이 훗날의 극단적인 행동으로 표출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한다.


결국 유방(劉邦/漢)이 항우(項羽/楚)를 물리치고 한왕(漢王)이 되자 황후가 된 여치에게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유방의 총애를 받고 있던 제2부인 척희(戚姬)라는 여인이었다. 척희는 대단한 미인이었으며 혁명과 전쟁의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8년간이나 유방과 함께 전선을 누빈 혁명동지이기도 했다. 척희에게는 여의(如意)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태자인 여치 소생의 유영(劉盈)이 선량하지만 나약한 성품인데 반해 척희 소생의 여의(如意)는 제왕으로서 필요한 품성을 모두 타고난 왕자였다고 한다.
유방은 나약한 태자 영(盈)을 폐하고 여의를 대신 후계자로 세우려고 하다가 중신들의 반발로 일단 보류한 적이 있는데 그 이후 여태후(呂太后)에게 척희 모자는 목의 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여태후는 이미 정계를 은퇴한 장량(長良)을 찾아가 그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태자의 폐위를 막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한나라(劉邦)가 천하를 통일하는 데는 세 사람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데 유방(劉邦/漢高祖)의 고향 친구인 소하(簫何)는 재상을 맡아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으며, 재사(才士) 장량(張良)은 최종적인 승리의 설계자였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명장(名將) 한신(韓信)이 있었다.
천하가 평정되자 장량은 스스로 은퇴하고 소하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갔으나, 한신(韓信)은 유방이 항우와 싸울 때 그를 여러 번 위기에서 구해내는 등 일등공신이었지만 후일 한왕(韓王)의 자리를 차지하는 등 권력욕이 강했다. 한신은 물러날 때를 알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항상 불평불만이 많았으나 유방은 차마 탓하지 못했다.
유방을 위해 껄끄러운 한신을 제거한 사람은 여황후였다. 그녀는 유방이 출타한 동안 한신에게 모반죄를 씌워 그의 일가친척, 친구들과 함께 그를 처형했다. 유방과 한신은 혁명 중에 서로에게 맹세하기를 “하늘과 땅을 보며 죽게 하지 않고 쇠붙이 무기를 보며 죽게 하지 않겠다."라는 서약을 했었다. 어떠한 경우에도 서로 상대방을 죽이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맹세였지만, 여황후는 이를 자신의 방식대로 해석했다. 한신을 죽일 때 자루를 씌우고 대나무 창으로 찔러「하늘과 땅을 보지 않게, 쇠붙이 무기를 보지 않게」죽인 것이다.

다음은 전쟁영웅인 양왕(梁王) 팽월(彭越)의 차례였다. 여후는 팽월의 측근들을 협박해서 그를 반역죄로 모함하도록 한 다음 그를 처형했다. 그녀는 팽월을 하나의 시범 케이스로 삼았다. 그의 뼈와 살로 육젓을 만들어 각 제후들에게 보내어 엄중하게 경고한 것이다.


유방이 죽고 열여섯 살의 아들 영(盈)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여치는 태후의 신분으로 정사에 깊숙이 관여했다. 연적인 척부인에게 오랫동안 칼날을 갈아왔던 그녀는 유방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그녀에 대한 복수를 단행했다. 여태후는 척부인의 머리카락을 모두 자르고 팔다리에 수갑을 채워 죄수복을 입혀 감옥에 가두고 곡식을 찧는 고된 노동을 시켰다. 당시 여의(如意/척부인의 아들) 왕자는 조왕(趙王)으로 봉해져 임지인 하북(河北) 지방에 나가 있었다. 여태후는 아예 후환을 없애기 위해 여의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그를 장안으로 불러들였다. 그러자 심성이 착했던 황제(劉盈/여태후의 아들)는 자신이 아예 성 밖으로 나가 어린 동생을 맞이하고 항상 그를 곁에 두면서 어머니의 음모로부터 보호했다. 그렇다고 순순히 포기할 태후가 아니었다. 여러 달이 지난 어느 겨울날 새벽, 황제가 잠시 사냥을 나간 틈을 이용해 태후는 여의(呂意)를 독살하는데 성공했다. 이때 여의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아들의 죽음을 듣고 척부인이 원망하자 척부인의 팔과 다리를 자르고 두 눈을 파냈으며 독한 증기를 쐬게 해서 귀를 멀게 하고 약을 먹여 벙어리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척부인을 “인간돼지”라고 부르도록 했다.


척부인의 비참한 모습을 본 어린 황제(惠帝) 영은 큰 충격을 받았다. 황제 영은 자신의 친누나인 노원공주가 낳은 딸 장씨를 왕후로 맞이해야 했다. 즉 자신의 조카와 결혼한 셈이었다. 또한 황제의 후궁들이 낳은 아들들을 황후가 데려와 키우게 하고 생모들은 모두 죽였다. 혜제의 뒤를 이어 그가 후궁으로부터 얻은 두 아들(척부인의 손자)이 차례로 허수아비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첫째가 유공(劉恭)이었는데, 4년째 재위하던 어느 날 자신의 친어머니가 태후 장씨가 아니라 할머니인 여태후에게 죽임을 당한 어느 여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는 한을 품었다. 이 사실이 여태후의 귀에 들어가자 그녀는 소년 황제를 가두어 놓고 굶겨 죽였다.
기원전 180년 어느 날 오랜만에 궁 밖으로 나갔던 여태후에게 개 한 마리가 갑자기 덤벼들어 그녀의 겨드랑이를 물었다. 그 일로 인해서 그녀는 병에 걸렸으며, 여태후는 그녀가 독살했던 유여의(劉呂意/척부인의 아들)의 귀신이 나타났다고 소리를 지르며 두려움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하는데 향년 62세였다.


(1)한고조 유방(劉邦) (2)유방의 부인 여태후  (3)유방의 제2부인 척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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